화녀'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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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에는 김기영 감독의 작품 전부를 보여주는 전작전이 있었다. 무려 한달전 이야기를 지금 쓰는것이 쑥쓰럽지만 블로그 개설이 늦었으니 어쩔수 없다.

김기영 감독하면 하녀 화녀 충녀등 '~녀' 시리즈로 유명한 감독이다. 간혹 김기덕 감독과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둘 다 남들이 만들지 않는 영화를 많이 만든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면이 많다. 김기영 감독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하녀(1960)다. 당시 25만 관객을 동원한 히트작이라고 하는데 꽤 유명한 '미워도 다시한번'이 20만이 못되는 관객을 동원했다고 하니 기괴한 영화라고 하지만 당시에도 호응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이벤트 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게 된 탓에, 하녀는 보지 못했다. 그것도 아주 우연하게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하게 정보를 얻게 된 것도 기이하다. 라디오는 잘 듣지도 않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도 행사 마지막날 갈 수 있는 기회를 간신히 얻었으니 더욱 기이하다. 아무 생각없이 던졌는데 쓰레기통에 정확히 들어가는 느낌... 뭔가 좋은 일이 생길것 같은 느낌... 이런 느낌 생기면 뭔가를 해야 될 것 같다.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한국영상자료원이었다. TV에서 하는 영화소개프로그램이 가끔씩 소개하기도 하는 곳인데 오래된 영화필름들을 보관하는 창고같은 곳이 간간히 나오곤 한다. 그러면서 나오는 코멘트는 "사라진줄 알았던 고전영화 필름이 발견되었습니다." 식이다. 그냥 창고 비슷한 곳으로 생각했는데 상영관도 있어서 옛날 영화들을 상영하기도 한다. 거기다가 관람료가 무료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니... 8000원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기대만땅으로 영화를 감상했더니 내가 뭔짓을 했나하는 후회를 할 때가 많다. 8000원이라는 돈도 아깝지만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듣기 마련이다. 섣부른 선택으로 후회만 남기 보다는 좋은 옛날 영화를 감상하는 편이 더 남는 것이다. 거기다 공짜잖아.

한국영상자료원이 있는 곳은 상암DMC. 아직 개발이 진행중이어서 빈곳이 더 많다. 들어가는 입구가 묘해서 찾기도 어렵다. 이런곳을 굳이 찾아올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광팬이 분명하다. 화녀'82 는 2관에서 상영했는데 전체100석중에서 약 절반 정도만 채워졌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많다. 아주 넓은 객석에 10명도 안되는 관객들과 영화를 봐야 했던 적이 많아서 걱정이 앞섰다. 관객이 적은 영화는 보기가 괴롭다. 웃기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웃어야 나도 웃을 수 있는데 관객이 적으면 웃기도 겁난다. 더구나 이런 희귀작이라면 찾는 사람도 적으니...

상영이 시작되자 객석에서 약간의 탄식이 나왔다. 보는 사람들도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 분명하다. 화면 가득한 스크래치와 잡음 섞인 녹음, 불안한 편집... 넓은 극장에서, 옛날 영화를, 수십명의 관객들과 본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음에 분명했다.


영화 내용은 이렇다.
남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 아가씨(명자, 나영희)가 주인집 아저씨(동식, 전무송)와 배가 맞아서 아이를 임신하고 주인집 안방마님이 되려하자 안주인(정순, 김지미)과 갈등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한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줄거리가 간단하다. 내용이 이렇게 간단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은 비슷한 소재를 사용하는 영화, 드라마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온 가정부가 응응해서 안방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수도 없이 반복된 이야기 패턴이다. 한국 드라마 3대 레퍼토리라는 재벌2세, 시한부인생, 출생의 비밀에 버금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특이하다, 기이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하게 시작하는 영화지만 마지막은 호러영화로 끝난다. 호러분위기를 낸다고 해서 사방에 피가 튀기거나 잔인한 장면이 화면 가득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잔인함을 느낄 수 있는 암시만 줄 뿐이다. 그런 잔인함을 느끼는 장치로 나온 것은 닭의 사료를 만드는 기계이다. 닭사료를 만들기 위해서 고기를 갈아내는 기계에 시체를 넣는 장면이 나오자 관객들이 경악을 했다. 피와 살이 사방에 튀었다면 완벽한 호러 영화가 되겠지만 그랬다면 검열 과정에서 삭제가 되었을 것이다. 명장면으로 손꼽는 장면들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많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보다도 더 잔인하고 더 음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각자의 상상력으로 마구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침없는 잔인성은 생존의 욕구에서 나온다. 하나가 올라가면 나머지 하나는 내려가야 한다. 신분상승의 욕구가 계단으로 표현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일단 내려가면 죽어야 한다.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지하실의 고기를 갈아내는 기계를 생각하면 더욱 더 섬뜩한데 거기까지 내려가면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다. 양계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명자와 결혼시켜주겠다는 조건하에 월급도 받지 못하고 일했다며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지하실로 내려간다. 명자를 달라는 말을 남긴채 말이다. 명자는 선택해야 한다. 지하실로 내려가면 신분상승은 불가능이다. 지금까지 이룩한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추락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살인을 통해서 극복하고 오히려 정순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정순이 지하실로 내려간다. 정순은 시체를 분쇄기로 갈아내는 것으로 답한다.

"아유, 오늘은 달걀이 얼마나 크고 실한지 몰라요."

닭모이로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시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정순. 너무 잔인하다고 느꼈는지 나중에는 시체를 갈아내었는지가 불분명하도록 만들었다. 상황이 갈 데까지 가버린 데다가 집안에서의 위치도 애매한 명자는 주인집 아저씨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이 때의 장면이 정말 묘하면서도 퇴폐적이다. 오스틴 파워스를 보면 알몸의 오스틴 파워스가 객실을 돌아다니는데 빵과 포크, 소파등의 소품으로 교묘하게 성기를 가리는 트릭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 명자의 성기를 소품을 통해서 교묘하게 가리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유횩을 하는 장면은 너무 노골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이 난다. (명자역의 나영희씨 표정이 너무 묘하고 당혹스럽다. 순진하면서도 너무나도 약오르는 표정이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코믹한 느낌까지 나게 하는 것이다. 가끔씩 웃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웃고 나면 되게 묘하다. 등장인물의 절박함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주인집 딸은 명자가 준 물에 쥐약을 넣었을 거라고 하자 명자는 자기가 직접 물을 마시면서 쥐약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이들이 안심하고 물을 먹자 입에 담고 있던 물을 스스로 뱉어내는 명자. (쥐약은 상황을 꽤 묘하게 만드는데 정순의 분쇄기와 명자의 쥐약은 서로를 제거할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놀란 아들이 계단에서 내려오다 굴러 떨어져 죽는다. 갈 때까지 간 상황에서 모든 것을 정리할 것을 요구하는 안주인의 요구에 명자는 자기 남자와 같이 죽는 것을 택하고 ,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양계장에서 기다리던 정순은 계단 밑에 죽어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계단위에 걸려있던 스테인드 글라스를 모두 깨버린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급스런 문화의 상징이고 양계장 일을 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고상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상징이다. 두 여자가 서로 추락하기 싫어서 서로를 위협하고 주거니 받거니(쥐약과, 분쇄기)하면서 갈등을 벌이지만 결국 모두 추락하고 말았다. 깨진 스테인드 글라스를 밟으면서 계단을 올라간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영화의 장르는 뭘까. 처음에는 평범한 멜로로 시작하고 중간은 누가 죽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살짝 미스터리 분위기가 난다. 그리고 마지막은 호러로 끝난다.

Wikipedia 의 영문 설명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Kim Ki-young (1 October 1922[1] ? February 5, 1998) was a South Korean film director, known for his intensely psychosexual and melodramatic horror films, often focusing on the psychology of their female characters.

psychosexual , melodramatic , horror  정말 묘하다. 평범한 줄거리의 이야기도 살짝 바꾸면 대단히 묘하고 재미있는 영화가 된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이후로 스타일을 모방한 영화들이 나올것 같았지만 그 이후로는 없는 것이 안타깝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케이블 채널에서 자체 제작한 단편중에서 '좋은 아내'라는 작품이 구성이 비슷한것 같다. 처음에는 아내의 부정을 둘러싼 멜로느낌으로 시작해서 남편을 불구로 만든것은 누구인가로 진행되는 미스터리, 그리고 남편을 너무 사랑하고 독점하고 싶어서 불구로 만드는 아내로 끝나는 호러. 결말을 예측하기 어렵고 보고 나면 잊을 수 없는것이 이런 작품들의 특징이다.

전작전에서 제일 보고 싶었던 것은 '바보사냥'과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였다. EBS 시네마천국에서 소개를 너무 재밌게 해서 꼭 보고 싶었지만 정보를 늦게 접한 탓에 마지막 날에 간신히 '화녀'82'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아쉬웠다. 아마 다시 상영할 날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번처럼 할 것 같지는 않다. 등장 배우들이 관객과 하는 이벤트를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 한 10년쯤 뒤? 그 때는 이미 사망한 배우들도 있을테니 그런 이벤트는 하지 않겠지. 다음에 일부 작품이라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