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등학교 때 나는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에 나오는 물레방앗간에서의 하룻밤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처음만나는 여자와 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무리 아름답게 묘사되었어도 그건 강간이 아니었을까?'

강간이었을 것이라는 의혹제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등장인물이 '선수'는 아닌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묘하게 느껴지는 등장인물에 대한 질투심, 그딴놈도 짝짓기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데 대한 허탈함 때문이다. 영화 <오 수정>에도 그런 장면 나오는것 같다. "지금 저 강간하려고 했던 거 알아요?" 말이 좋아 인연이지 뭐가 달라?

'물레방앗간이 아닌 낯선 곳이라면 낯선 여자와의 하룻밤 인연을 맺을수 있지 않을까?'

서로가 처음 경험해 보는 낯선 곳에서 우연을 가장하여 인연을 만들고 생각지도 못했던 횡재(?)를 얻는 상상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나 홀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은근히 그런 인연에 대한 기대도 있는 거지 뭐.

실제로 그런 로망(!)을 실현해 내는 것이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다. 그런데 은근히 부담스럽다. '주둥이질'이 약한 나로서는 계속해서 말을 건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질 수 없기에 늘상 꿈만 꾸는 나에게 <낮술>은 웃기면서도 공감이 많이 가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정말 우연하게 보게 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하녀>를 보다가 우연히 스케줄 표를 보고 <낮술>이 30일에 상영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잿팟이 연속으로 터지는 기분이었다. 시네마테크에 도착해서 보니 유명세 때문인지 객석이 대부분 채워졌다. 독립영화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시작부터 술자리 장면이다. 왜 그런 사람들 있잖은가. 술만 마시면 해결사가 되어서 무엇이든 해결해 주겠노라고 약속하는 사람들. 나중에 물어보면 기억을 못한다.  술에 잔뜩 취해도 기억할것은 다 기억하는 '혁진'은 꼭 내모습 같았다. 정말 매사에 진지해서 손해보는 사람이 꼭 있다. 정선 터미널에서 친구들의 배신(!)을 확인하고 집에 가려는 혁진에게 친구는 선배가 운영하는 펜션에 꼭 가보라고 블라블라를 해댄다.

'아... 정말 말많고 대책없는 사람들...'

차로 펜션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걸 궂이 걸어서 가겠다는 혁진...

'아니, 저건 나랑 완전히 똑같잖아!'

그냥 편하게 살면 될것을, 행여나 남들에게 피해나 줄까봐 생각만 많이 하는 인간. 그런데 그런다고 고마워 하는 사람들 아무도 없어. 고생을 사서 한 결과는... 엉뚱한 펜션에 도착. 놀러와서 술마시고 TV만 주구장창 보다가 혼자 여행온 옆방 여자와의 하룻밤 인연을 상상한다. 옆방으로 와인을 가져가서... 그런데, 문을 연 사람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 다음날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옆방 여자. 술사달라는 말에 혹시라도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지만... 전날의 사내가 차 타라고 하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 버린다. 혁진은 황당한 상황에 어쩔줄을 모른다.

'아... 진지하게 살아봐야 남는 거 없어.'

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이상한 여자. 이영애처럼 사진을 찍더니 하이쿠를 아냐고 묻는다. 거의 '도를 아십니까?' 분위기. 실제로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다. 정동진에 혼자 여행갔다가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사람 만난적이 있다. 길이 막히니까 이쪽으로 가면 더 빠르고...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다. "이쪽으로 가는것이 더 빠르지 않나요?" '아니 왜 그걸 나한테 물어?'

강릉에 도착해서 혁진이 한일은? 해변에서 소주에 컵라면 먹기. 이런날은 소주에 컵라면이 딱이라는 옆방 여자의 말에 넘어갔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억지로 컵라면을 먹어대는것은 옆방 여자와의 인연이 아쉽기 때문이겠지. 정말 우연히도 옆방여자와 사내를 만나면서 또다시 환상을 품게 되지만 결과는 팬티바람으로 노숙을 했다. 그래도 옆방커플이 신발은 남겨놨으니 양심은 있는건가? 이제는 로맨스고 뭐고 빨리 집에 가야한다.
 
간신히 얻어탄 트럭. 어찌어찌해서 기사와 같이 잠을 자는데 가슴팍을 쓰다듬는 손길... 그렇다고 한밤중에 어딜 가나.

결국 친구가 와서 선배가 운영한다는 펜션에 도착하지만 여기서도 술을 권한다. 남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술이 끊이지 않는다. 여자와의 술자리를 기대했는데 왜 맨날 이러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집으로 가려는데, 터미널에서 여자를 만난다.

"혼자 여행하시나 봐요? 저도 혼자 왔는데..."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여자와의 만남에 대한 환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다. 진행자는 이 영화가 한 남자의 욕망이 번번히 좌절되는 영화라고 소개를 했다. 그러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주인공이 찌찔한 짓을 하고 다녀도 할건 다 하고 다니는 영화라나. 감독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응모를 했지만 번번히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100만원이라도 지원해 달라고 징징댔는데도 안되었다고 한다.

그럼 제작비 1000만원은 어디서 났을까?

[제작: 엄마]

감독은 냉면집 아들이라는데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지만 어찌어찌해서 집에서 1000만원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이거 망했으면 어쩔뻔 했냐. 감독은 뜻밖에도 배우들이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고 한다. 특히 옆방여자의 남자와 트럭운전기사는 평소에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제작비는 적지만 술은 원없이 마시게 해주겠다는 말에 배우들이 맥주를 달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소주로...

나는 주인공 '혁진'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캐스팅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질문을 했다. 처음에는 다른 배우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배우가 너무 어두운 분위기여서 차마 캐스팅을 못하고 감독이 정선에 가있는 동안 스탭에게 부탁해서 연기를 촬영한 비디오를 보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연기경력이 너무 많지 않고 친근해 보이는 인상의 배우를 골랐다나. 주변에서 '혁진'같은 사람을 많이 봤기 때문에 그게 연기였는지 진짜 모습인지 내심 기대했기 때문에 캐스팅 과정이 궁금했던 것인데 결국은 연기였다. 뭔가 좀 아쉬움이 남는군. 감독과의 대화가 끝나자 저녁 7시가 넘었다. 그 시간까지 객석을 지킨 사람이 많은 걸 보면 확실히 호응이 대단하다.

결론 : 혼자 여행가봐야 별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