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보고 싶었던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보게 되었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개관 1주년 기념으로 상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3회 상영중 마지막 상영일(5월 28일)을 하루 앞두고 말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전에도 가본적이 있어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에는 월드컵경기장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갔는데 이번에는 수색역에서 내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수색역이나 월드컵경기장이나 별 차이가 없다. 어느역에서 내리든 간에 15분은 걸어야 한다. 뛰어서 도착해보니 온몸에서 땀이 났다. 이미 상영이 시작된 어두컴컴한 객석을 둘러보니 객석의 절반 이상이 채워진 것 같았다. 생각 보다 관객수가 많았다.
<하녀>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1960년 작품을 본다는 것이 내심 불안했는데, 생각외로 화질이 좋았다. 디지털 복원을 했기 때문인것 같았다. 하지만 중반 이후에는 화질이 급격하게 저하된다. <화녀' 82> 보다 더 좋다는 평가가 있어서 어떤 영화일지 그동안 내내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좋다.' <화녀 '82> 는 중간중간 무의미한 장면들도 많이 나오고 중간이 좀 늘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하녀> 는 보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칠수가 없다. <화녀 '82> 의 명자(나영희)가 좀 바보같으면서 색기가 도는 캐릭터 였다면 <하녀>의 이은심은 두번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공포감을 일으키는 캐릭터다. 짙은 눈썹과 깡마른 몸매, 매섭게 노려보는 커다란 두눈. 이은심씨가 이 영화 이후로는 작품 활동을 못했다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꿈에 나올까 두렵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점은 영화의 주요 무대인 2층집의 구조다. 피아노가 있는 방과 하녀의 숙소는 유리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유리문을 빠져 나와서 옆 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하녀가 통로를 통해 빠져나와서 피아노를 치는 음악선생을 바라보며 신분상승의 기회를 엿보는 장면, 간신히 획득한 안주인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매섭게 상대방을 노려보는 장면등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유리문을 통해서 보는 장면은 하녀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피아노가 있는 2층집에서 살고 싶고, 안주인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적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날밤 하녀가 갑자기 유리문에 서있는 장면이 있는데 , 관객들 모두가 경악을 했다. 지금도 소름이 끼치는데 1960년에는 얼마나 놀라웠을까.
터미네이터 1탄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총에 맞아도 불에 타도 죽지 않고 따라오는 괴물에 대한 공포감을 제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녀>에서 느껴지는 것은 점점 내가 가진 것을 뺏아가는 존재, 그러면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감이 아닐까.
어렸을때 큰아버지 댁에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 거실에 있었던 피아노가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아니, 피아노가 있는 집이 부러웠다. 좀 무리를 하면 중고 피아노를 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피아노를 쳐도 주변에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만큼 큰 집을 구하기는 어렵다. 음악 선생이 하녀보고 피아노를 치지 말라고 한말이 인상 깊게 머리속에 남았다. 하녀는 단순히 피아노가 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있는 큰집이 가지고 싶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선생도 그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피아노에 손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어딜 넘보냐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 초반부에도 그런 의도의 장면이 나온다. 방직공장의 여공이 러브레터를 보내자 바로 기숙사 사감에게 꼬질러 버리는 장면이다. 피아노가 있는 2층집을 가진 사람에게 방직공장의 여공은 레벨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난다. 그냥 웃어넘길수도 있었을 러브레터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너랑은 수준차이가 난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화녀 '82> 와 마찬가지로 <하녀> 에서도 쥐약을 둘러싼 안주인들(?)간의 묘한 긴장감이 나타난다. <화녀 '82>에서는 사료 만드는 기계가 나와서 필요하면 너 따위는 기계로 갈아서 닭사료로 만들수도 있다는 으스스한 장면이 추가되었다. 이런 장면이 추가되어서 약간씩 변화를 주려고 하기는 했지만 <하녀>에서의 쥐약 장면처럼 긴장감있게 이끌어 나가지는 못했다. <하녀>에서 서로를 제거할 수 있는 도구는 쥐약 뿐이다.
'가위로 찔러 죽일 수도 있고 칼로 찔러 죽일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쥐약이지?'
요즘 영화 같았으면 화면 가득하게 피를 튀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영화들이 있지만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지는 않다. 피도 안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 없어도 공포감을 주는 영화. 이런 점 때문에 <하녀>가 아직도 높은 평가를 받는것 같다. 시작은 멜로, 진행은 스릴러, 결말은 호러로 끝나는 독특한 영화를 보는 것은 아주 가끔 느낄수 있는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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